Tuesday, January 17, 2006

혐일류

오늘 본 기사 중 제일 웃긴 것.

‘돈만 된다면야…’ 日출판사들 ‘혐일류’에 벌써 눈독 (쿠기뉴스, 01/16)

최근 일본에서 발간되다가 국외에서도 화제가 됐다는 "혐한류" 라는 만화책이 있는데, 김 아무개라는 한국인 만화가가 벌써 그 모방 작품을 펴낸다고 한다.

"반박" 하려는 바로 그 상대방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으면 "반박" 조차 제대로 못하는 한국인을 본 것은 나도 이게 한두번이 아닌데, 바로 그 "반박" 으로 돈벌이까지 하려는 자가 남이 "혐일류에 눈독을 들인다" 면서 운운하는 모습은 하나의 희극이다.

(물론, 이와같은 만화책을 일본 국내에서 판매하고자 하는 일본 출판사가 실제로 있다면 나도 그러한 장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 "혐한류"이든 "혐일류"이든 결국 최근의 쓸데없는 "한류" 장사의 아종 (亞種)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기사 중 특히 웃기는 것은 그 김모 작가의 아래 발언:

“...혐한류에 대응하는 한국 대표 만화책을 펴내는데 막 그릴 수 있습니까? 이건 그냥 갈 수 없는 작품입니다. 그림과 내용 모두 완성도를 최고로 끌어 올려야죠. 혐일류는 제가 가장 느리게 제작하는 작품이 될 겁니다.”

"그림과 내용 모두 완성도를 최고로" 끌어 올리는 노력은 괜찮은데, 아무래도 이 김모씨는 일본 출판사한테 팔 판권 값을 최고로 끌어 올리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판권 값 걱정을 하기 전에 먼저 책을 빨리 완성시키는 게 좋을 텐데. 참조로 이와 같은 행태를 일본어로 取らぬ狸の皮算用라 한다.

Friday, January 13, 2006

한국 웹사이트, 또 도작

오늘 점심 시간에 본 기사.

위 기사에 따르면, 한국 웹사이트 "게임타임"에 1월 11일 게재된 "[인터뷰] 피터무어, "Xbox360에 블루레이 디스크도 장착 가능"" 이라는 인터뷰 기사는 그 전날인 10일자 일본 "ITmedia"의 기사 「短期でなく、長期的な視野で日本市場に取り組んでいる――ピーター・ムーア氏インタビュー」를 도작해, 마치 자신들이 인터뷰를 한 것처럼 꾸민 것.

실제로 인터뷰 내용이 혹사한데다가 일부 사진마저 도용돼 있다. 게다가 그 도용된 사진의 경우, 일부러 "ITmedia" Logo를 trim out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위 blog에 따르면, ITmedia 편집부에 문의한 결과 "앞으로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대답을 얻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해당 인터뷰가 ITmedia와 게임타임 쌍방의 공동취재 등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뭐 해적판(海賊版) 대국인 한국에 살고 있으면 아예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텐데...

지만원 소장에게 보낸 공개질문장

원문 URL: http://blog.daum.net/subakdoduk/1988210

원문 투고 날짜: 2005/04/19

아래는 지만원씨의 웹사이트인 "System Club"의 "네티즌 기고"라는 게시판에 남긴 글을 퍼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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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관련: 지만원 소장님께 드리는 공개질문장
경애하는 지만원 소장님께

지난 04/13부터 04/15까지 4차례에 걸쳐서 게재하신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 시리즈를 매우 관심있게 배독하였습니다. 한국에서 그동안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고 있던 "위안부"와 "정신대"의 차이, 그리고 그 시절의 조선인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서의 "강제성" 여부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의 면에서, 한국 국내에서 발표된 의견으로서는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오늘은 그 글들 중에서 느낀 약간의 의문점에 대해 질문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 일 법정 2004/11/29 판결에 대하여

지만원 소장님께서 올리신 글들에는 "심미자 할머니는 2004.11.29. 일본 대법원에서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판결 받은 분"이라는 취지의 기술이 몇 번이나 나오는데, 소장님께서는 2004/11/29 일본 최고재판소가 내린 판결문을 확인해 보셨는지에 대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zephyr.dti.ne.jp/~kj8899/saikousai.ju.html

이 페이지에 그 판결 때의 모양과 아울러 판결문 전문 (한국어로도 읽을 수 있음), 그리고 관련 보도 기사들이 게재되어 있는데, 심미자씨도 방청석에 있었다는 이 최고재 판결은 대법정이 아닌 제2소법정에서 내린 것인데다가, 심씨 등이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인정되기는 커녕 원고 (위안부 등) 측의 상고가 기각되어 원고측의 패소가 확정된 것이랍니다.

2. 심미자씨가 일본 정부에서 받았다는 편지에 대하여

Vol.4 에서 지만원 소장님께서는 심미자씨가 일본 정부에서 받았다는 편지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소장님께서 이 편지를 직접 보셨는지에 대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와 아울러 그 편지에서 어떤 인물이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서명했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3. 심미자씨의 일본행 경위에 대하여

Vol.2에서 소개된 심미자씨의 인터뷰 중에는,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에서 "일본군 또는 정부에 의한 강제연행의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강제연행의 사실" 여부는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인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대해 지만원 소장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심미자씨가 당시 거주하던 지역에 대하여

Vol.2에서 소개된 심미자씨의 증언 가운데서 "독립군"이 일본에 찾아왔을 때의 경험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일본군 위안부"로서 "일본에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래 "위안부"란 일본군이 국외 주둔지에서 마련한 '위안소'라 불린 시설에서 일하던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 내지(內地)에서 헌병대장의 애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면 그는 본래 "위안부"의 정의 그 자체에 해당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 점에 대한 지만원 소장님의 견해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5. 심미자씨의 과거의 증언 경력에 대하여

심미자씨는 일련의 위안부 재판으 때문에 일본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1.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사건" 소장 (1991년 12월 6일 제소)
  2. "일본의 전후 책임을 밝혀내는 모임"이 1992년 6월 간행한 "학끼리 통신" 제3호에 나오는 사정 청취 (조사 날짜: 1992년 2월 16-17일, 3월 9-10일)
  3. 伊藤孝司 편저 "〈증언〉 종군위안부 - 여자금로정신대" (風媒社, 1992) 에 나오는 증언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 정대협과 정신대연구회가 1993년 2월 합동으로 간행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 1"
에서는 심씨의 증언은 채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 "증언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싫어 하는 사람, 또는 증언이 때마다 서로 어긋나거나 이야기의 맥락이 안 맞아 조사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을 제외해 가면서 최종적으로 조사를 완료한 것이 이 책에 기재된 19명의 증언이다" (p. 22) "조사자들을 가장 혼란하게 한 것은, 증언자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례였다" (p. 7)

지만원 소장님께서 Vol.4에서 지적하신 "정대협과 심할머니는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점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소장님의 견해를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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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질문은 이상 5가지입니다. 여러가지로 바쁘시겠지만, 제발 납득할 만한 대답을 받을 수 있으면 합니다.

끝으로, 이 질문장은 저의 blog에서도 이미 공개된 바임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5/04/18 수박도둑 드림
◇ 참고 ◇ ※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 (1) (2) (3) (4) ---System Club

Tuesday, January 10, 2006

테스트

이 글은 그냥 전체 레이아웃 조정을 위해 올리는 것으로 HTML template와 CSS 등 조정이 끝나는대로 삭제할 예정임.